본문 바로가기

출력

혼합물의 분리.

 내가 사는 곳은 이 도시에서 그나마 조금은 번화한 곳 바로 뒤쪽. 학기 중에 학교에서 프로젝트나 어떤 사적이지 않은 일에 시달리고 나서 뒤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으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과제나 시험에, 심지어 프리젠테이션용 PPT의 지극히 사소한 디테일에도 목숨을 걸다시피 몇시간 며칠 몇주를 달려드는 사람들 틈 속에서 살다가, 역에서 지하도로 올라서는 순간 '우스울 정도로 다른' 세상의 경계와 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까. 술이 달아올라 상기된 얼굴, 비틀대며 걷다 간혹 소리를 지르곤 하지. 수많은 포장마차, 그보다 많은 술집, 그만큼 많은 모텔. 어디서 저 많은 사람들이 도깨비처럼 튀어나와서 대낮같이 훤하게 밤을 보내는 것일까. 한껏 파인 옷에 두꺼운 화장, 분명 예전과는 다른 발소리를 가졌을, 눈길은 가지만 호감은 가지 않는 그녀들. 사내녀석들도 치장한 모양새는 매한가지다. 한참을 걸어 네온사인들의 행렬이 끝나고 비로소 조용해질 무렵까지 온통 시시덕거리거나 부둥켜안은 사람들 투성이.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익숙한 광경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생각한다: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가 저들보다 과연 보람이 있긴 했었던 걸까, 뭔가 분주한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내 노력이 어쩐지 미심쩍다...

 어째서 내게 저들보다 나은 미래가 올 거란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걸까. 그토록 두려워하던, '가능성은 있지만 단지 그뿐인 존재'로 남는 일에 되도록이면 목격자가 적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돈다. 실망스러운 결과들, 체로 걸러지는 듯한 기분. 지하철역 두 정거장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았는데, 공연히 하루에 한 번씩 다른 세상의 경계를 가로지르기를 헛되이 반복해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