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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저는 다 솔직했는 걸요."

*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곤혹스러운 점으로 으레 꼽아왔던 것이 휴일을 포함한 비업무시간에 부득이하게 업무 연락을 받는 경우이다. 정확히는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사무실에서의 어떤 ‘모드’를 강제로 장착하게 될 때의 그 기분. 어느 쪽이건 자신의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러한 태세 전환이 유쾌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끄집어내어 목도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은희는 하루 동안 세 명의 남자와 대화한다. 한 명은 처음 만난 일본인 소설가, 다른 한 명은 갓 뜨기 시작한 동료 배우이자 남자친구, 나머지 한 명은 남자친구 몰래 만나고 있던 이혼남. 은희 역시 그 셋과 마주하는 동안에는 세 명의 각기 다른 어조와 표정을 가진 누군가였을 것이다. 1:1 대응으로 상대방에 따라 겹치지 않는 구획 안에서, 그녀는 안정적이고도 능숙하게 자신의 캐릭터들을 운용한다. 물론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주인공이 일삼는 거짓말과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지만, 그러한 설정과는 별개로 서로 동떨어진 모드의 은희들에게서 엿보인 내 모습이 자꾸만 딴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기실 어느 정도는 가변적인 대인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은희가 묶었던 머리를 푸는 대목에서 – 역할을 만들 때 아마도 캐릭터 전환의 장치로 의도한 것이 아닐까 – 저 휴일 업무 연락이 떠올랐던 거였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를 머리끈을 찾아 다급하게 묶는 것만 같은. 언제쯤 이런 상황에 초연해질 수 있으려나.

* 치정으로 얽힌 나머지 둘과는 달리 료헤이는 은희와 만나고 있지 않을 때의 에피소드가 관객에게 노출된다. 소설가를 거짓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 웃어넘기듯이 묘사한 이후, 료헤이는 자신의 창작물로 대변되는 그 거짓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은희가 시달리는 동안 작품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한다. 재회 후 그가 새로 떠올린 스토리를 풀어놓는 것이 종래에는 ‘최악의 하루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말로 귀결되는 것까지. (이 친절하기만한 엔딩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극 중에서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고 난 후의 정취는, 평소 이 시기의 밤에 기대하는 운치와 정확히 들어맞는 좋은 느낌이었다. 두런거리며 거니는 길,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 조만간 밤에 남산 한 번 걸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