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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입력해주세요 #9.

<2017-10-06 21:48 원본 작성>

1.

인천공항에서의 입출국 일정은 항상 봉피양에서 시작된다. 냉면 먹고 출국, 입국해서는 냉면 먹고 집으로.

2.

식사를 마치고 두시반 항공편 수속을 위해 루프트한자 카운터로 향했는데 줄이 다른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여기며 먹었던 냉면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지나치게 긴 허리띠를 맨 것마냥 정해진 대기열로부터 한참을 삐져나와 늘어져있는 줄 끄트머리에 서서는, 그간 이 일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고작 이런 이유로 모든 게 허사가 되는 건가.

3.

대기행렬이론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queueing이라는 단어는 영단어 중 모음이 연속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이다.

4.

위탁수하물이 없어서 체크인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나 자동 체크인은 국내 항공사 한정으로 가능했다. 뭐가 무너지건 솟아날 구멍은 찾아야하겠기에 모바일로 검색을 시도하던 중 루프트한자가 온라인 전용 탑승수속 카운터를 제공한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홈페이지에서 체크인을 위하여 항공편 정보를 입력하니 취소된 비행이라고 나온다. 출발편 안내 전광판에는 멀쩡하게 그 비행기가 나와있는데? 홈페이지 하단의 고객센터 연락처로 전화를 걸며 핸드폰을 얼굴에 갖다댄 채로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내 앞에 선 외국인들을 배웅하러 온 한국인 친구들이 카운터에서 상황을 알아와서는 중계를 해주는 모양이었는데, 잘 들리지 않는 대화 속에서 언뜻 쇼핑이나 하러가자는 얘기만 토막토막 들려온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다. 결항이다, 원한다면 호텔을 잡아줄 수 있다, 혹시 다른 비행편으로 곧바로 대체가 필요한 급한 일정인가. 이런저런 문답 끝에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던 기존 비행편이 방콕 - 비엔나 경유로 바뀌며 환승 대기 시간까지 포함하여 여행시간이 여섯시간 늘어났다. 애시당초 휴가 소진을 최소화하여 빠듯하게 짜놓은 일정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끝까지 쉬이 보내주질 않는구나.

5.

두시반에서 여섯시반으로 출발 일정이 변경되면서 김포공항까지 다시 거슬러 이동하여 공항몰에서 트레이닝복 하의를 구매하기로 한다. 기왕 탈 거 편하게는 타야겠고, 대학 신입생 때 사서 줄창 입었던 건 얼마 전 14년 만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비슷한 두 종류가 가격대만 다르기에 어떤 차이가 있냐고 물어보니 점원은 어쨌거나 어느 쪽이 더 잘 나간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설명이 탐탁치 않다. 다녀오는 데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얼른 계산을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온다.

6.

대체 비행편은 아시아나여서 자동 체크인이 가능했다. 아까 길었던 줄에 질겁하여 이번에는 부리나케 움직인 덕에 출국 심사 통과 후에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안내 로봇에 호기심을 느낀 중국인이 게이트 정보를 입력하여 로봇에게 에스코트받는 걸 구경했다. 깜빡하고 챙겨오지 않은 목베개도 하나 샀다.

7.

탑승시간이 여섯시인데 항공기 연결 관계로 45분 지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스케줄로 맞춰놓은 탓에 환승 시간이 한시간반 남짓이어서 또다시 초조해졌다. 방콕에서 내리자마자 체감상 거의 2km를 내달린 끝에 간신히 제시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제일 끝부분에 있는 게이트이기도 하거니와, 공항 자체가 무지막지하게 크더라. 시간 내서 천천히 구경해보지 못한 게 아쉽다.

8.

나머지 여정은 오스트리아 항공이었는데, 오스트리아 국적 항공사임에도 루프트한자 그룹 산하에 있는 건 처음 안 사실. 승무원들이 빨간 상의에 빨간 스커트, 빨간 스타킹에 빨간 구두인 이국적이다 못해 이질적인 느낌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9.

ABC 좌석 중 내가 복도 쪽, 스무살쯤 되어보이는 흑인 여자애가 중간 자리였는데 갑자기 바지 허리 사이즈가 족히 내 두배는 되어보이는 뚱뚱한 아저씨 하나가 오더니 창가 쪽으로 가서 앉았다. 자리가 몸에 맞지 않자 본인 좌석과 중간 좌석 사이의 팔걸이를 위로 올리고 앉아서 혼자 1.5인석을 차지하고는, 벙쪄있는 여자와 나를 '아 시바 나도 잣같어 나보고 어쩌라고'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나야 크게 문제없었지만 여자분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끝내 승무원에게 요청하여 다른 좌석으로 옮겨갔는데, 덕분에 의도치 않게 한층 쾌적한 여행이 될 수 있었다. 그 아저씨는 기내식은 하나도 안먹으면서 계속 샌드위치 타령만 했다.

10.

샤킬 오닐 다큐멘터리: 내가 로스터를 구성하면 센터 중에는 반드시 포함될 인물. 트레이드 이면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2016 베를린필 갈라 콘서트: 사이먼 래틀 지휘. 이번 베를린필 내한 공연에 못가는 건 정말 두고두고 후회할 듯. 베를린에 가는 길이긴 하다만 어쨌거나 여행의 목적이 그게 아니므로. 다닐 트리포노프가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을 연주했는데 머리스타일이 묘하게 나와 닮아서 왠지 모르게 신경쓰였다.
얼라이드: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스파이물이지만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와는 당연하게도 전혀 다른 노선. 안타까울 정도로 절절한 로맨스.

11.

비엔나 공항 기념품점에는 'No kangaroos in Austria'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판다. 그럴싸하군.

12.

비엔나에서 베를린 테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창가 자리. 여기서 읽고 있던 책을 마무리했다. 도착 시간은 현지 오전 여덟시반. 교통권 티켓을 일일권으로 끊고 곧장 The Expo Berlin Vital로 향한다. 버스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커다란 사이언톨로지 건물이 보인다. 지하철에서는 '대한독립영화제'라고 한글로 표기되어있는 한국문화원 주최 행사 포스터를 봤다.

13.

엑스포에 도착해서 배번표와 레이스 물품을 수령한다. 메인 스폰서인 아디다스 부스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업체들이 위치해있다. 대부분 러닝 용품 판매나 다른 유럽권 대회의 홍보 위주. 인상깊었던 건 사진으로만 봐왔던 six star medal(세계 6대 대회 완주 메달)과 함께 해당 메달이 수여된 인원들의 명단이 적혀있던 곳. 우리나라 분들도 여럿 보였다.

14.

숙소는 5층 건물로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도착하여 예약을 확인하니 어제 안와서 no-show 처리했다고 왜 전화 안줬냐고 난리다. 여차저차 체크인 후 샤워를 하고 박물관 섬으로 향한다. Alte Nationalgalerie - Neues Museum - Altes Museum 순으로 관람했는데 고미술에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뒤쪽 두 개는 어떤 감흥이라기보다는 '남의 나라 남의 문명의 유물이 이렇게나 많다니 아오' 정도의 느낌이었다. Alte Nationalgalerie(구 국립 미술관)은 회화 위주. 단순히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간 것치고는 예상 외로 정말 재미있게 관람했다. 특히 아돌프 멘첼이나 카스파르 프리드리히같은 독일 화가 작품들을 많이 접한 것이 수확. Pergamon Museum은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

15.

박물관 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내일까지 비가 계속 올텐데 그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와서는 기어이 우중주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다음날 아침 대회장 위치를 확인한다. 지도 상으로는 그렇게 멀지 않다, 아마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여전히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호스텔 방은 남의 나라. 달리는 게 뭐라고 이렇게 해외까지 나와서. 참 놀라운 일이다, 스스로를 잘 모르겠다...빗소리가 유난히 무겁고 둔탁하다.

16.

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비는 거의 잦아든 상태. 마라톤하기에는 제법 괜찮은 날씨가 되었다. 식사 후 숙소 밖으로 나서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곧바로 닿을 수 있는 경로는 주최 측에서 통제하여 큰 공원 하나를 빙 둘러서 출발점까지 왔다. 마라톤 출발 이전에 누워서 타는 자전거? 레이스가 먼저 시작될 때 출발점에 모여있던 마라톤 인파들이 카운트할 때마다 박수를 치면서 응원해주는 것부터 벌써부터 마음이 벅차서 뭉클했다. 이 대회를 신청할 때만 해도 풀코스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제일 뒤쪽인 H그룹으로 배정받았는데, A부터 H까지 가는 거리가 까마득하게 멀 정도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도로에 꽉꽉 들어차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룹별로 시간차를 두고서 각각 출발했기 때문에 대회 시작 이후 내가 출발할 수 있었던 건 거의 1시간 뒤의 일이었다.

17.

출발선을 나서고나서부터 가장 놀란 점은 어느 구간이건 길 양쪽에 응원 인단이 길게 늘어져있었다는 점. 보통 국내 대회의 경우 같은 동호회나 러닝크루가 극히 일부 구간에서 응원하는 것을 제외하면 시민들 대다수는 시큰둥하거나 교통 체증에 역정을 내는 경우가 대다수인 데 반해, 이 대회는 마치 도시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응원하는 느낌. 그저 남의 일로만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길을 나선 사람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 마라톤 대회에 대한 인식과 접근의 차이. 그 낯설었던 감각이 아직까지도 꿈만 같다. 그런 고마운 환대를, 뛰는 사람들에 뒤지지 않는 열기의 함성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18.

태극기를 서너번 정도 본 것 같다. 한 번은 정확하게는 태극 문양이 정중앙에 새겨진 소고였지만.

19.

물컵이 종이가 아니라 얇은 플라스틱이어서 평소 달릴 때처럼 컵 입구를 구부려 좁게 만들어먹지 못한 건 다소 불편했다. 참가자가 많다보니 길가에 떨어진 컵의 수량이 압도적인 수준.

20.

33km 지점에서 너무 일찍 무너졌다. 다른 대회 신청할 때 PB에 베를린 마라톤 기록을 적을 수 있도록 여기서 잘 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된 LSD나 카보로딩없이 요행을 바랬던 건 아무래도 무리였나보다. 36km인가까지 쥐가 난 걸 가라앉히며 걷다 뛰기를 반복하다가, 41km까지 어떻게든 버티며 뛰어왔더니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배번표에 적힌 영문명을 인파들이 보고서 이름을 외쳐주며 계속 뛰라고 하고, 나는 목례로 고마움을 표하며 억지로라도 발걸음을 내딛기를 수차례. 결승점 전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보일 때에도 허벅지가 또다시 뭉쳐와서 절뚝거리고 있던 찰나에 아파죽겠는데 갑자기 어떤 새끼가 분이 등을 막 밀면서 나를 앞으로 모는 게 아닌가.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앞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십여미터를 밀며 얼마 안남았다고 계속 가라고 하던 그 백인 청년은 그렇게 앞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나는 그대로 멈추지 않고 결승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중에 잔디밭에서 쉬고 있는데 다시 와서는 괜찮냐고 하고 쿨하게 가더라.

21.

사실 비참했다. 멀리까지 와서 잘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날씨는 추운데 이 상태로 숙소까지 가는 것도 막막하고. 그렇게 메달이며 이것저것 수령하고는 잔디밭에서 쉬다가 돌아가려고 나선 길에 내가 한시간 전쯤에 밀쳐지다시피 통과했던 그 구간을 맞닥뜨리면서 정신이 번쩍들었다. 여전히 레이스는 계속되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결승점을 앞둔 환희에 부푼 얼굴이었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전혀 지치지 않은 목소리. 달려오는 내내 느꼈던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기록이야 어찌됐건 내가 이들 덕분에 완주한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나도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순간부터 그제서야 즐거워질 수 있었다. 거기서 한시간쯤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각자 다른 이유로 달리지만,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매듭지어지고 귀결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벅찬 일인가. 혈혈단신으로 참가했지만 종래에는 마치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했던 것처럼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것. 그 공감대는 일반적인 대회 참가의 의미를 넘어서는 좋은 경험이었다.

22.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상태로 결국 걸어서 숙소로. 오는 도중에도 아직까지 들어오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숙소에 들어와서는 빵 하나 먹고 바로 잠들었다. 그 날따라 굴라쉬가 너무 먹고 싶었다.

23.

새벽에 눈을 떠보니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빌빌거릴 게 뻔하다고 생각해서 일정을 전혀 잡지 않은 상태. 오후 한시십분 비행기로 귀국 전에 조금 더 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챙겨입고 연중무휴 노천미술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정말 아무도 없어서 인적없는 길을 따라 여유롭게 구경하는 데 성공.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전날 통과했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돌아보고, 추모라는 것이 어떤 제약된 방식을 떠나 이런 뻔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로 발현 가능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자칫 단순하게만 받아들여질수도 있는 사각기둥의 나열을 평면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감정을 이입하는 매개체로 활용할 줄이야. 발상 자체도 대단하지만, 이 설계안을 제도권에서 받아들여 베를린 중심부에, 그것도 축구장 몇 개 크기의 면적으로 조성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24.

그 와중에 도쿄 마라톤 2년 연속 광탈. 베를린도 친구는 떨어지고 나 혼자 되더니, 도쿄는 내가 떨어지고 친구만 됐네.

25.

베를린 테겔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면세점에서 겔랑 베티버 하나 쟁여둘까 하다가 단념했다. 돌아가는 길은 그래도 무탈하겠구나 하고 안심했건만 인천 가는
비행기에 내 자리 스크린이 소리가 안나와. 승무원이 자리를 옮길지 바우처 받고 그냥 갈지를 결정하라길래 바우처 받고 그걸로 기내 면세점에서 떼르 데르메스 질렀다. 인생 몰라요.

26.

열시간이십분 비행이었는데 출발하고는 어영부영하다가 잠든 후 눈 떠보니 비행시간이 두시간 남았대. 올해 들어서 가장 푹 잠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장거리 비행을 이렇게 수월하게 간 적이 없었는데.

27.

도착해서 마일리지 적립하고 냉면. 다녀온 게 전부 꿈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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