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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결산.

* 김애란은 내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작가이다. 까마득히 멀게만 여겨왔던 원숙한 소설가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80년대생의 등단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란. 그 당시만 해도 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연배의 작가가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보여준 공동 생활에 대한 통찰이 새삼 와닿았던 대학 신입생 시절, 그녀는 내게 경탄과 동경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이후로 그녀의 커리어는 순조롭게 쌓여갔다. 수상 소식들이 잇달아 들려오고, 장편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영화화가 이루어졌다. 어느 가수가 그녀의 소설집 제목과 거기에 실린 단편에 있는 문장을 표절할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게 김애란은 같은 소설집에 실린 「물속 골리앗」 도입부의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마가 졌다. 마을엔 길이 끊기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무만 봤다. 태풍에 몸을 맡긴 채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고목이었다. 나무는 대낮에도 검은 실루엣을 드리우며 서 있었다.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 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 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목은 장마 내 몸을 틀었다. 끌려가는 건지 버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뿌리가 있는 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순응과 저항 사이의 미묘한 춤을 췄다. 그것은 백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먼지 낀 유리 너머로 소리가 삭제된 채 보이는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았다.

* 올해 일어났던 일들에 당위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바람은 온갖 상식 밖의 형태로 나를 흔들었다. 때 아닌 봄에 찾아온 태풍은 계절이 한 순배 도는 동안에도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다. 내내 휘어지고 쓰러질 듯한 상(像)이었던 연유를 설명할 재간은 없다. 다만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저 그뿐이다. 지새운 밤들이 공연한 헛수고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돌발 상황 수습 용도의 지출이 많았던 한편으로는,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연말정산 의료비 세액공제 요건을 최초로 충족시킬만한 것을 앓기도 했다. 사람들을 잃은 반면, 불면 촉진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비난과 오해를 얻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평소대로의 처신이 어려워 몰염치하고 무책임한 모습이었음에도,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시퀀스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져 그 상황에 처한 나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치 천 개의 이벤트가 가진 천 개의 방향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단 한 개의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숟가락질 한 번, 젓가락질 한 번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던 나 이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운 세상이었다. 지겹지 않았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 계간 「문학동네」의 2019년 가을호는 통권 100호째의 발행이었다. 100호 기념 특별부록 「아뇨, 문학은 그런 것입니다」는 100인의 시인 · 소설가들에게서 '문학은 나에게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무엇일 것인가?'에 대한 답을 모아 엮은 기록이다. 광화문 교보문고 잡지 매대에서 이 부록을 읽다가 김애란의 또다른 '이런 문장'과 마주한 순간. 나는 올해 어느 순간도 그 때만큼 온 마음으로 위안을 느낀 적이 없었다.

 만일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이 허무나 권태와 맞닥뜨리는 걸 뜻하는 거라면 그걸 관리하는 기술이랄까 도구를 나는 문학을 통해 얻었다. 그리고 갈수록 문학에 대한 어떠한 환상이나 숭배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의미나 태도에 도취되기보다 다만 기술을 연마하다보니 절로 익히게 된 삶의 자세가 있다. 구호나 당위 이전에 한 인물의 삶을 통해 그 인물의 욕망과 좌절, 유예와 꾸물거림, 실패를 총체적으로, 육체적으로 함께 경험하며 닿은 이해가 있다. 문학이 그걸 독점했다는 뜻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쪽으로 특화되어왔다는 얘기다. 문학은 내게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구체와 실감의 영역이며 이 실감은 나를 예감과 공감, 만감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나는 외향적인 인간도 모험심이 강한 작가도 아니다. 다만 어떤 이야기를 보다 잘 전달하고픈 욕구와 기술적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떤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하게 됐다. 항상 감각을 열어두고 자극을 받아들이며 편견을 교정하려 애쓰게 됐다. 물론 실패할 때도 많지만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바깥 세계를 내 살갗으로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끼고 해석하고픈 욕구를 갖게 됐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런 연습 자체가, 또 시도가, 내 삶을 보다 좋은 곳으로 이끌어줌을 알게 됐다. 처음엔 그저 그런 게 필요해서 시작했을 뿐인데,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내게 '글쓰기'와 '글 읽기'는 직업이거나 취미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며 훗날 직업적 의미를 잃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이 존재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 내게서 감상 경험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건사하는 과정에서 좋은 작품, 좋은 물건,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믿는 오만한 안목과, 필요한 정보들을 인지하고 다루는 요령, 단순한 밥벌이 다음 단계의 것들을 누리기 위한 경제 활동에의 의지를 얻었다. 적정 수준의 생계를 유지하며 이 도시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같은 것이 있다면, 나의 경우 그 역량의 근간은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집념에 있다. 단지 접하는 찰나의 즐거움이나 탐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경지에 다다른 준수한 무언가에 능동적으로 감응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개선을 그치지 않는 것. 내 안에서는 이것이 세간에서 실용서 등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성과 못지않게 실질적인 차원의 자기계발이며, 이 방식이 내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최적화된 형태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지금과 같은 태풍에 꺾일 듯이 휘청일지라도, 이를 버텨내는 내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유난히 탈이 많았던 한 해를 보내며 이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견뎌내야할 바람이 몇 점 남아있다해도 기꺼이 견뎌내겠다. 다만 지난한 삶의 연속이다. 그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