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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가브리엘 대천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환생이란 고등학교 학생들이 치르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과 같은 거요. 낙방하면 재수를 하게 되어있소. 당신들은 낙방이오. 따라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오」
 나는 고개를 떨군다.
 로즈와 아망딘과 나는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부질없이 또 한 번의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보다 먼저 심판을 받은 영혼 중에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런 탄식을 했을까?

- 베르나르 베르베르, 「천사들의 제국」

* 집에 돌아와서 예전 메모들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문구다. 책의 흐름에 있어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옮겨놓았던 건, 아마 이걸 수능이 끝난 직후에 읽어서 당시에 했던 고민들과 맞물려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재수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부질없이 또 한 번의 삶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섣불리 출발점으로 자신을 되돌리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에 와서는 전부 소용닿지 않게 된 얘기이고 후회를 남기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건 분명 내 인생에 있어서 기억될만한 어떤 '분기'였다.

* 동생이 재수를 결심했다. 그는 내가 예전에 뜻을 꺾었던 그 분기에서 나와는 달리 자신의 선택을 보란 듯이 관철 시켰다. 나는 이 아이에게 여지껏 수험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일은 해주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제와서 이 중대한 결정에 다소간의 영향을 미칠만한 충고나 조언을 해줄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다만 마음 속으로 응원하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축복하는 수밖에. 어쩌면 나는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뒤에도 여러 개의 갈랫길에 놓여졌었지만, 삶의 큰 맥락이나 주된 흐름이 온전히 내게서 비롯된 적은, 없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몇 번이나 떠밀렸다...

* 가장 친한 친구가 마지막 수능을 치렀다. 운이 없었다. 교복을 벗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우리는 하나의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무엇이관대 이토록 '하나의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다시 새로운 것을 쥐도록 만드는가, 이 관문 하나에 남은 생의 온갖 행불행이라도 달린 것처럼. 명목상의 '성인'이 된 후에 우리를 흔들고 지나갈 갖가지 일들 중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그는 진저리가 날 정도로 겪어냈다. 그리고는 묻는다, 부질없는 시간이었던가?
 아니다, 난 그를 위해 앞으로 더 많은 것이 예비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간 기울인 노력들이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발현될 것임을, 수년간 그의 곁에서 지켜보며 '필사적으로' 믿어왔다. 만약 이 기대가 저버림당한다면, 나는 이 생이 정말 엉터리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 누군가를 접하게 되었을 때 부족한 정보 중 그나마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학력이라서 그런지, 학벌을 구분하면서 생성되는 '이미지'에서 은연 중에 우열이 갈려버리는 건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흔히들 말하는 학교 간판이 소속 학생에게 직접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명예다, 각자의 됨됨이는 자신들이 만드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지나치기 쉬운 어떤 상황에서 종종 내 손에 내가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잣대가 들려있는 것을 목격하게 될 때마다 의아스럽다. 이것이 '더 나은 것'을 가지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 부합하는 방향인 거라면, 평균 깎아먹는 입장에서는 달가워해야하는 상황인 걸까.

  • 염소 2008.01.28 19:57

    대부분 시험들이 그렇긴 하지만 수능도 운이 엄청 작용하는 시험 중에 하나죠...요즘은 입시가 너무 복잡하고 뭐가 많아서 아이들이 안됐어요. 중,고등학생 사촌동생들 보면 안타깝더라구요. 저도 재수를 했는데 오히려 그나마 어릴 때 재수생활을 해서 나이 들어서 무언가에 실패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상황을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수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당시는 내 인생 최초의 실패이고 좌절이라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없었다면 자만했을 수도 있고 더 나이가 들어서 고시든 취업이든 어떤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받는 상처와 충격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 Favicon of https://delic.kr BlogIcon Delic 2008.01.29 11:07 신고

      시간이 지나 염소 님처럼 취업이나 그 뒤의 다른 '분기'를 겪은 분들에게는 선행 과정이나 통과점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그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물론 나중을 생각하자면 실패를 감당해낸 경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욕심 같아서는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은 그저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져서 더 값진 자신감을 얻었으면 좋겠어요.